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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AI시대, 국가 안보와 역사학 _ 우동현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우동현 교수,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AI시대의 세계적 화두는 단연 이 기술로 어떤 국가가 더 많은 이득을 보느냐일 것이다. 냉전 시기(1945-1991)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을 재현하듯, 미국과 중국을 필두로 여러 국가는 AI에 전폭적인 투자를 기울이고 있다. AI가 단순한 컴퓨터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안보, 경제적 번영, 사회 관리 등과 직결되는 전략적 자산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AI 인프라 개발 사업인 스타게이트 프로젝트(Stargate Project)는 2029년까지 미화 5천억 달러(한화 약 696.7조 원)의 투자를 예고했다. 대한민국 국가인공지능위원회도 2024년 9월 설립되었다.

AI는 방대한 양의 디지털 데이터를 학습하고 연산(compute)하여 감지된 데이터상의 패턴을 바탕으로 판단과 예측을 수행하는 작업에 최적화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AI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특정한 업무를 수행해 사용자의 판단을 보조할 수 있는 결과를 제시한다. 이세돌 기사에게 패배를 선사한 알파고(AlphaGo)나 최근 로봇공학과의 적극적인 결합이 보여주는 것처럼, AI는 점차 일반적인 생산 공정과 사무 활동의 자동화라는 오래된 꿈을 현실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AI를 탑재한 살상용 로봇은 이미 실전에 배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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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어두운 그림자』 표지
출처: 교보문고

이렇게 AI가 산업계와 전장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현장에 적극 도입되면서 나타날 가까운 미래에 대한 탁월한 안내서로 카이스트 김창익 교수의 『인공지능의 어두운 그림자』(홍릉, 2024)를 들 수 있다. 한때 널리 유포된 AI의 발전상에 대한 장밋빛 기대와는 분명한 선을 긋는 이 책은 AI의 발달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적 위험(catastrophic risks)의 여러 사례를 인공지능 전문가의 시선에서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미지(未知)의 영역인 미래를 현재와 과거의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하는 작업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국가의 생존을 최우선의 고려사항으로 삼는 안보 분야에서도 AI의 활용에 따른 미래 예측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어려운 과제임을 알려준다.

필자가 전공하는 역사학은 제한된 정보인 사료(史料)를 모은 뒤 세밀하게 독해하여 과거의 특정한 국면이나 변화의 과정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하는 임무를 지닌다. 상식과는 달리, 우리는 과거에 대해 잘 모르고 때로는 어떤 것을 모르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과거에 대한 정보가 미래 예측에 필요한 데이터만큼이나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뢰성 있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요구되나 이에 대한 보상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좋은 역사학적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품질의 데이터를 입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말이다.

AI시대인 오늘날에도 국가가 사람들의 삶과 활동의 기본 무대이자 기초적인 단위가 되는 근대 국가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생존을 위해 국방과 안보에 최고의 정책적 중요성을 부여할 것이다. 이때 AI를 활용해 자국의 국방력을 높이고 타국의 안보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긴급한 사안으로 부상했다. 독일의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스타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2025년 2월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약 68%에 해당하는 55.6억 명이 인터넷을 쓰고 있고 52.4억 명이 SNS를 이용하고 있다.

인지전(cognitive warfare)은 이러한 AI시대의 지구적인 소통이 이뤄지는 디지털 환경을 겨냥하는 새로운 유형의 전쟁이다. 인지전은 미국·유럽·중국 등지에서 201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쓰인 용어로 기관마다 정의를 조금씩 다르게 내리긴 하지만, 그 핵심은 대상 국민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어 태도와 행동 양식을 조정하는 것(김창익, 2024, 133)이다. 다시 말해, 인지전은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지 방식을 공략하고자 한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인터넷과 SNS로 연결된 현재, 인지전은 진행 중이다.

필자의 전공 분야에서는 인지전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는 심리전, 사상전, 선전전 등이 주요한 탐구 소재가 된다. 그렇다면 20세기 벌어진 인지전은 어떤 형태를 띠었을까? 당시의 인지전이 성공적이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오늘날 인지전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반대로 그러한 노력이 실패였다면, 거기서 오늘날 국가 안보를 고려하는 이들이 배울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일까? 필자가 작년에 번역해 출간한 한 역사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일정한 답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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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유령』 한국어판 표지
출처: Book21

조너선 해슬럼(Jonathan Haslam)은 소련외교사의 “원로”(doyen)라는 별칭을 가진 탁월한 역사가이다. 필자는 박사학위논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그의 학술을 집대성한 전간기(interwar period) 세계사 저작인 『전쟁의 유령』(원제: The Spectre of War, 2021)을 접할 수 있었다. 서문부터 결론까지 40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그에 대한 서구 경세가들의 대응에서 찾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인지전은 물론, 전쟁과 제국 외교, 스탈린 시기 소련의 세계혁명 전략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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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ris의 표지
출처: 하버드대학

『전쟁의 유령』이 출간된 이후, 세계는 또 한 번 변화의 격랑에 휩싸였다. 필자가 박사학위논문을 거의 집필한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침공의 전후로 다양한 수준에서의 사이버 공격과 피해가 포착돼 언론에 보도되었다.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이미 2014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는 보는 견해도 있다. 다양한 예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쟁은 벌써 3년째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해슬럼은 이 비극적인 전쟁의 탈냉전적 기원을 추적하는 책인 『오만』(원제: Hubris, 2024)을 펴냈다.

해슬럼의 저작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바로 최고 결정권자의 인지가 갖는 중요성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전쟁의 유령』은 영국의 경세가들이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더하여 인류사상 가장 최악의 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향하는 길에서 대영제국 지도층이 공유했던 반공주의적 정서를 세밀하게 서술한다. 그 결과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국역이 시급한 『오만』은 미국의 정치인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점진적 동진(東進)에 대한 탈냉전기 러시아 지도부의 우려와 위기의식을 적극적으로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현재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다.

물론 전간기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제국들은 제한적인 민주주의 국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의 유령』에 드러난 영국의 경우가 보여주듯, 유권자들의 선택이 최고 결정권자의 생각을 뒤집진 못했다. 1930년대 중반, 영국에서는 국방과 집단안보에 대한 전국적 설문조사인 평화 투표(Peace Ballot)가 실시됐다. 당시 투표에 참여한 1,150만여 명 가운데 약 80%가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한 징벌적인 경제·군사적 제재를 타국에 가하는 데 동의했다. 영국 유권자 대다수는 조국이 국제정치적 개입을 실천으로 옮기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최고 결정권자들은 당시 동아프리카를 침공한 이탈리아에 실질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전쟁의 유령』에 등장하는 소련의 경우도 흥미롭긴 마찬가지이다. 당시 대외적으로 소련의 외교는 내각 기구인 외무성(당시 명칭은 외무인민위원부)이 담당했다. 하지만 세계혁명의 중심지로서 소련은 각지의 공산당과 노동당을 조율하는 기구인 코민테른(Comintern)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의 전복을 기도했다. 그리고 외무성과 코민테른 모두 제한된 자원을 확보하고 자신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최고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스탈린은 외무성과 코민테른을 좌지우지했고 결국 서구 경세가들의 예측을 깨고 1939년 8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서명 1주일 뒤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인류는 또 한 번 대전의 화마에 휩싸이게 되었다.

필자는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상투어를 믿지 않는 편이지만, 인지전과 그 전사인 심리전의 과거를 연구하고 재구성하면서 적어도 한 가지는 명확히 반복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바로 최고 결정권자의 이해와 판단, 즉 인지가 갖는 중요성이다. 한편 최고 결정권자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던 정치체의 여론을 얼마나 결정에 반영했을까? 『전쟁의 유령』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사례는 여론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권자가 자신의 신념과 생각에 기반해 투표에 참여하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2024년, 세계에서 인구수 상위 10위권의 나라 중 미국, 러시아 등을 포함한 8개 국가에서 선거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다면, 유권자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힘을 가진 AI시대에 국가 안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가 좀 더 명확해진다. 『전쟁의 유령』의 결론부가 들려주듯, 공산주의나 파시즘 등 판도의 극단에 걸친 생각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극단주의적 사상들은 언제나 국민 대다수가 경제적 불안정성과 박탈감을 느끼는 순간에 매력적인 선택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국민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안정감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구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AI시대 인지전의 위협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방안이지 않을까?